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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다시 읽는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 여행기』는 네 편으로 되어있다. 1부 소인국을 시작으로 2부 거인국, 3부 하늘을 나는 섬 라푸타, 마지막 4부 휴이넘의 나라이다. 소인국과 거인국을 떼어 각색한 것으로 원작자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1726년경에 발표했을 때는 당시 영국의 사회적 군상들을 풍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4부 휴이넘은 신랄한 풍자로 신성모독 딱지가 붙어 오랫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한 금서였다. 우선 소인국과 거인국에서 당시 영국이 겪고 있는 사회상을 아주 작은 소인국과 터무니없이 큰 거인국에 견주어 그들이 하는 전쟁이나 시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또한 공들인 식민수탈정치가 얼마나 부도덕한지를 풍자하고 있었다. 『걸리버 여행기』 다시 읽기의 백미는 제4부이다. 성년의 걸리버 여행기로 알려진 휴이넘의 나라를 살펴보면 우선 설정부터 불편하다. 네 번째로 배가 난파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말이 사회의 주인인 『휴이넘의 나라』였다. 야후라고 불리는 미개한 인간을 지배하는 미려하고 건장한 말을 닮은 휴이넘이 통치하는 곳이다. 그들은 사회의 주인으로 매우 이성적이고, 책임감과 청결함, 특히 언어능력이 있어 반목이나 불화는 없었다. 반면 인간 형상을 한 야후는 이성적이지 않았고, 언어능력 없어 외마디 괴성만을 지를 뿐 탐욕스러워 늘 음식을 놓고 동료와 싸우고, 불결하며 적대적이고, 야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야후족은 휴이넘에게 언제나 더럽고 처치 곤란한 짐승이며 다루기 힘든 노예였다. 그런데 그동안 우화 속에는 보통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으로 믿는 엄연한 현생 인류를 객관화하여, 그것도 종자를 달리하는 말의 눈으로 인간을 투사한다는 것이 참으로 낯선 일이었다. 사람의 속성을 갈파하기 위한 작가의 선구적 예지와 무대 속에 인간을 던져놓은 설정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유명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야후가 바로 그 야후족에서 이름을 따온 것은 재미있는 일화이다. 야후가 세기말을 거치면서 뜻이 야만인, 세련되지 못한 시골뜨기 정도로 의미가 확대되었는데, 스탠포드대학 동기인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가 자신들을 야후라고 장난스럽게 이름을 지었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본다. 인간 군상은 그들의 탐욕만큼이나 많다. 그래서 작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소인국에서 바라본 우리는 과연 어떤 군상이며, 거인국에서 바라본 나는 또 얼마나 왜소한 존재였는지, 말이 지배하는 휴이넘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열악한 야후였는지…. 역지사지의 미학이며 소통의 첫걸음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남의 입장 되어 보기가 사회 구성원간 매너이자 예의로 봐도 무방하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겐 꼭 필요한 도덕률 같은 것이리라. 더 나아가 우리를 길러준 제도와 사회에 대한 은근한 충성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딴생각을 품게 된다면 한 번쯤 사회제도와 제도가 갖는 권위, 힘의 관성도 가끔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역할과 사회 일반에 퍼져있는 공동선을 수행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불빛과 세상에 돌려줘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기어코 그렇게 해야 하는 믿음의 근거를 아직도 속 깊게 걸리버 여행기가 말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김준혜/뉴스타 부동산

2017-10-20

[살며 생각하며] 겸이포 리발소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계집아이였던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를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나서는 이발소행은 극성스런 남동생들을 따돌리고 아버지를 독차지하는 늘 기분 좋은 추억으로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  우리 가족은 그 시절을 훗날 살던 주소를 근거로 ‘산 9번지 집’에 살 때로 언급한다. 거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텔레비전은 물론 도서관도 없고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라 근처 도자기 공장에서 정오가 되면 흔히 오포를 분다고 표현하던 사이렌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접할 수 있는 문화가 전무한 시절의 해방촌살이였지만 아버지와 내가 가던 ‘겸이포 리발소’는 분명 한 문화의 형태로 자리 잡은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사원이었다. 그곳에는 우선 순서를 기다리는 도마 의자 옆에 ‘새 소년’ 등 보기 드문 잡지와 어른들이 보는 신문도 두 종류나 있었고 커다란 거울 양쪽 벽에 교실의 교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이, 그리고 급훈 자리에는 한 농부가 헤설피 우는 소를 따라가며 힘겹게 밭을 가는 배경으로 멋 부려 흘려 쓴 세로로 씌인 한글체가 있었다. 친절하게도 제목은‘푸쉬킨의 삶’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아했던 것은 밀레의 ‘만종’ 그림에는 제목과는 달리 어느구석에도 종이 없었고 푸쉬킨의 삶이란 시에는 ‘삶’은 없고 일하는 모습만 있어 아버지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이발소 간판으로 고향의 지명을 내세운 것만 봐도 사무치는 그리움 같은 것이 어린 내게도 전해져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해도 피난민인 아버지는 두고 온 고향산천 겸이포를 추억하며 “에구! 그 땅을 언제 밟아보나?” 하면서 늙은이처럼 한숨을 포옥 내쉬곤 했다. 어느덧 내 순서가 끝나고 이발소 팔걸이 위에 보조로 걸려 있는 송판에서 내려와 이제는 거대한 바퀴 손잡이가 달린 의자에서 왕처럼 앉아있는 아버지 차례가 된다. 어느새 손 바퀴를 조정하였는지 거의 눕다시피 하여 아버지는 면도를 받고 있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 막기 위해 커다란 보자기를 쓰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복장의 유사성 때문인지 거만한 자세로 인한 것인지 어느새 그대로 왕으로 등극한 로마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주철 난로 연통에 비누 거품을 묻힌 솔을 몇 번 비벼 적당히 데운 후 까칠한 아버지 얼굴과 목에 넉넉하게 칠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닳고 닳은 가죽 혁대에 칼 면도를 이쪽저쪽 번갈아 벼른다. 이윽고 번득이는 날을 아버지 목에 대고는 한치 주저도 없이 목을 타고 죽죽 훑으며 내려가면 ‘싸아악’ 소리와 함께 비누거품이 면도날에 걸리면서 말끔하게 소름 돋은 아버지 목이 드러나고 순간 정육점 아저씨의 고기를 발라내는 익숙한 손놀림이 내 머릿속에서 겹쳐지면서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만다. 만약 이발소 아저씨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그리되면 아버지 없이 성냥팔이 소녀와 소공녀처럼 살아갈 내 모습과 가족이 그려지면서 나는 거의 울상이 된다. 비정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나는 영악하게도 내가 살아갈 고민을 했다. 그것이 염치없어 “아버지 안 아파?” 거푸 묻는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으면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붉고 푸른색 띠가 나란한 대각선으로 끝없이 말아 올라가는 이발소를 뒤로하고 부녀는 손을 잡고 해지는 산 9번지로 올라간다. 지나고 보니 허망하게도 반세기 전 계집아이의 기억이었다. 김준혜/뉴스타 부동산

2017-06-09

[살며 생각하며] 내 마음속의 풍경

나이가 들어 이제 회상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어린 시절 방학 때면 방학책 겉표지에 그려져 있던 한 폭의 수채화 그림이 늘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몇 그루의 미루나무 위에 흰 뭉게구름이 걸려있고 하얗게 부서지는 웃음을 날리며 홍조 띤 아이들이 잠자리 채 같은 걸 가지고 무엇인가 수집하려 좁은 농로를 따라 걸어가는 그런 그림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무엇인가에 쫓기는 심정일 때 그 그림을 생각하면 까닭 없이 느긋하고 한가로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또 하나 더 연상되는 기억은 역시 방학 때 찾아간 어느 시골의 모습이다. 녹음이 우거진 염천의 하늘 밑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멀리서 사람은 보이지 않은 채 집채만한 커다란 지게 풀섶만이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넘어 사라지던 모습, 사라지고 난 후의 그 묘한 아련함이라고나 할까. 아득한 삶의 부하 같은 것이 어린 내게도 전해져 그 후로 내가 삶의 신산스런 굽이를 돌 때면 용케도 건들거리며 사라지던 풀섭 지게의 모습이 한 폭의 애잔한 마음속 풍경으로 떠올랐다 그 이후 더러 성의 없는 밥상머리에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찬물 마시듯 소주를 마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라든지, 30여 년 전 이민 와 처음으로 겪은 우체부 배달직 훈련 3일째 망아지만한 개에 쫓겨 줄행랑을 놓던 내 작은 모습에서도 나는 그 풀섭 지게의 풍경을 떠올리며 제법 향수와 같은 용기를 얻곤 했다. 누가 해도 천박하게 들리는 이른바 ‘먹고 산다’는 말, 그 행위의 집행만큼은 너무 고지식하여,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한 끼니 앞에 진실로 무력하였다…. 듣기 좋은 위로처럼 들리겠으나 호랑이도 함정에 빠지면 꼬리를 흔들어 밥을 구한다 들었다. 엉뚱한 전용(轉用) 같지만, 냉정한 법마저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행한 살인조차도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것도 기억할만 하다. 또한 역사적 영웅들도 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도 막부를 세워 근세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도 다키다와의 한판 대결을 가르는 고비에서 도망을 치는데 나중에 보니 얼마나 줄행랑을 볼품없게 쳐놨던지 말안장에 생똥을 싸붙였고, 조조도 마초에 쫓길 때는 붉은 전포와 투구를 벗어 던지고 얼른 수염을 잘라 졸장들 틈에 끼여 위장함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아 금박 먹인 명함 하나 못 갖추며 살았고, 가정을 일구어 아이들을 성공 가도로 몰아넣지도 못했다. 게다가 삶의 윤리마저도 적당한 비겁과 소심으로 살아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로 보면 우린 그때그때 나름 진지하고 대체로 성실했으며, 최선이라 여긴 일을 하며 산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그리 큰 부끄러움은 아닐 것이다. 삶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경작과 같아서 사람이 하는 역할이 있고 하늘이 하는 몫도 엄연히 있을 것이다.  설사 내 바람이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원망함도, 땅을 굽어 서운함도 이제 의미가 없다. 우리가 겨누고 있는 것은 한 점 흠결 없는 ‘완벽한 삶’이 아니라, 엎어지고 넘어지되 얼마나 실하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 가느냐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느닷없지만 우주의 섭리가 있으므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늘이 그렇게 시리도록 푸르고 강물은 하염없이 도도하며 바다와 산이 이토록 의연할 수 있단 말인가…. 김준혜/부동산 에이전트

2017-02-24

[살며 생각하며]영등포 시장과 한인타운

오월동주로 유명한 월나라에 서시(西施)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타고난 미모가 어찌도 그리 곱고 우아하던지 심지어 강가에서 빨래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을 때 주변을 유영하던 물고기가 물에 비친 서시의 모습에 도취, 그만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몰입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서시의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그것을 감상하던 물고기를 강 밑으로 가라앉게 했다는 뜻으로 ‘침어(沈魚)의 미모’라 부른다. 그런데 그 아리따운 불세출의 미인이 오늘날로 말하면 심장병이나 가슴앓이 병이라도 앓고 있었던 건지 가끔 가슴이 아플 때면 가슴을 움키듯 살포시 두 손을 포개고는 통증을 참아내듯 콧잔등이와 미간에 살짝 고운 주름을 만들며 낮달같이 찡그리는 눈매가 너무 곱고 매력적이어서 동네의 또래는 물론 이웃 마을의 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따라 하게 되는 춘사(椿事)아닌 춘사가 되었다. 요즘 말로 문화 현상인 셈인데, 어쨌든 역시 미인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해도 이쁜 모양이다. 오늘날까지도 효빈(效嚬) 즉, 찡그리는 것을 본받아 따라 한다는 뜻을 남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형편을 생각지 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 내 웃음거리가 되거나 남의 비난을 받아 미움을 받을 때 사용하는 빈축(嚬蹙)을 산다는 말의 원형적 유래다. 크랜베리 소스 들큼한 터키를 먹고 추수감사절을 보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추석을 대신한다면 못내 섭섭해 할 동포들이 많다. 떡방아 간의 추억은 없다 하더라도 한국마켓에서 송편이라도 사오거나 배라도 한 상자 들여나야 속이 편한 이들은 어떤 면에서 동시대 속에 두 문화권에서 산다고 봐야 한다. 생활의 현장은 이곳 미국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기른 그리움과 익숙한 한국 문화를 찾다 보니 동포신문을 구독하고,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한국 문화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문화의 알맹이보다 한류로 적당히 포장한 근거 없는 허례나 턱없는 허식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난데없는 입성 치레와 세계생산량의 팔 할 이상이 한국과 일본에서 소비된다는 어느 회사 제품의 핸드백, 또각거리며 걷는 나란한 행진, 나이 든 축에 속하는 여인네의 보라색 머리염색까지 생경스러움을 넘어 눈뜨고 바라보기에도 폭력스러웠던 적은 혹 없었는지. 워낙 잘사는 친정집(한국) 일이라 지극히 조심스럽고 다소 민망하더라도 천편일률적인 유행의 따라쟁이 짓을 가소롭게 생각도 해보고 좀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유행의 집단 히스테리 쏠림 현상이나 부박한 ‘바보들의 행진’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정집의 이런 바보들의 행진에 대해 동포들의 작은 역할은 어쩌면 더욱 냉담해지고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동포사회 특유의 문화도 창출되고 걸러져 언젠가는 하나 된 고향 땅이 동포문화를 은근히 부러워 본받는 날도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가깝게는 애난데일이나 엘리컷시티의 한인타운이 영락없는 영등포 시장통과 구별할 수 없다면 그것도 문화적 재앙일 수도 있겠다 싶다. 단순한 취향의 충돌이라서가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2500년 전 효빈(效嚬)과 빈축의 그 우새스러운 모습을 닮아서이기에 더 그렇다.

2016-07-22

[살며 생각하며]우이동 친정 나들이

얼마 전 한국방문 때 있었던 일이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방문할 친척 집도, 만날 친구도 대충 소화해낸 상태라 느긋한 마음으로 걷다 지쳐 돈암동에서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기차가 수유리 쪽으로 가자 이제는 지상철이 되어 석양을 받은 우이동 북한산의 수려한 자태를 볼 수 있었다 30년 세월 저쪽의 추억이 아직도 거기에 산악처럼 버티고 있었다.   무슨 호기였는지 나는 그 다음 날 날이 밝자 우이동 계곡을 찾았다. 일부러 삼선교에서 출발, 아리랑 고개를 넘어 빨래 빨던 정릉을 거쳐 도선사로 가는 유년의 추억을 따라 그 길을 되짚어가는 치밀함을 보였다. 우이동 도선사를 향해 가는데 아무래도 인수봉에 다다르면 허기가 질 것 같아 사하촌 밑에서 김밥 등을 말아 파는 아주머니에게서 김밥 한 줄을 받아든 내 손안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백이 들려있었다.   건강검진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런저런 상념과 더불어 새롭게 돋아나는 추억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섞어 걷는 길은 지나간 세월에 비해 그런대로 변하지 않아 더욱 흥취가 났다. 근데 고약한 것은 그 다음에 있었다. 오르는 산굽이마다 한줄기 부는 바람의 신선함도 잠깐, 정상 구비 등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등산객들과의 어정쩡한 조우는 참으로 곤혹이었다. 처음에는 눈치가 없어 몰랐으나 어색한 대로 싫지 않은 눈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그들을 보려면 남녀노소를 할 것 없이 한결같이 곁을 안 준다고나 할까. 새침한 것이 여간 아니었다. 하여튼 내리보는 표정이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실로 나로서는 경험치 못한 그지없는 그 도도와 경멸의 표정들, 여기 말로 ‘dirty look’을 주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필자도 살았다면 미국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소박한 “안녕하세요”는 커녕 마주치는 눈인사도 일시에 외면당하는 무안함이었다.   그런데 백운대던가 인수봉 정상에서든가 제법 널찍한 바위에서 서로 무리 지어 밥을 먹는데 필자도 가지고 간 김밥을 펼쳐 놓고 입에 넣는 순간 그것도 깨달음처럼 일시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렇게 냉담으로 나를 대했는지를….   문제는 바로 복장이었다! 그러니까 고국의 친정 사람들은 등산해도 한껏 차려입고 야외활동에 걸맞은 온갖 색깔, 그것도 형형색색의 네온 색을 이용한 전문 등산복이었다. 기세로 보면 당장 히말라야라도 오를 복장과 등산용 지팡이 등 트레일 전용으로 고안된 날렵한 신과 너무 과장된 등산용 양말 등을 일제히 갖춘 것에 비해 나는 편한 복장으로 산책처럼 나온 것이 겨우 코스트코 청바지에, 달랑 상표 없는 티셔츠에, 손에는 김밥이 든 검은 봉지. 그나마 가파른 산행을 하느라 흔들고 다니다 보니 거의 봉다리 수준이 되어버린 형국이었다.   딱 그들의 눈에는 내 행색이 이건 여자 김삿갓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정말 영 아니었던 것이었다. 실로 그들로 봐서는 자기들이 들인 노력에 비해 감히 나의 차림으로 산에 오르는 것이 무슨 중대한 모욕을 당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았다.   그걸 빤히 앞뒤로 따갑게 느끼면서 지점에 따라서는 같이 오르는 인수봉 철계단 등에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높이며 김 회장, 이 회장, 오 여사를 찾아가며 북돋는데 어느 시절 무슨 회장인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에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한국 특유의 아웃도어 스포츠웨어 문화는 체류 기간은 물론, 나중에 서울을 떠나는 공항에서까지 꾸준히 보게 되는 진풍경에 기가 죽었다. 시집간 가난한 딸네 집 찾아가느니 차라리 가을 들녘을 서성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너무 호령하듯 떵떵거리는 친정집 식구에게 시집의 궁색을 보여주는 것 역시 까닭 없이 주눅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2016-07-15

[살며 생각하며]드론이 올 때까지는…

일주일 전쯤의 일이다.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마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495를 어쩔 수 없이 탔다. 역시 한결같이 막히는 도로, 1cm도 움직이지 않는 우리 쪽 차선에서 E-Z 패스 간판 아래로 쌩쌩 달리는 유료도로의 흐름을 무심히 바라보다 은근히 치미는 부아를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원래 나는 남의 집 정원과 수영장을 탐냈던 적 없이 살아왔다. 혹 지나치는 부러움이 있을 수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울타리 넘어 남의 집 이야기여서 이렇다 할 시샘과 고까움 없이 어지간하게 살아왔음을 감사드린다.   또 돌아보면 내가 살면서 언제나 길은 그런대로 공평해서 내가 가는 길이 유료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공평히 유료였고, 그것이 무료라면 균등히 무료였다. 그래서 길은 어디까지나 공적이었고 균등했던 이유로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옛이야기가 된 것 같아 불길하다. 민주와 공화가 없던 시절에도 대체로 길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의 사유재산으로부터 독립되어 유지되어왔다. 또 길은 한정된 사회간접 자본으로 어쩌다 차선 하나를 더 늘리려 해도 족히 20년의 준비와 시공 그에 따른 교통혼잡 등 사회적 비용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길은 공동의 자산이며 선대가 과거 순혈의 세금으로 일구어 놓았고 우리가 사용 유지하다 자동차가 없어지고 드론이 활개치기 전까지는 아마도 왜소한대로 후대에 남겨줄 유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우리의 양보와 희생 위에서 만들어진 길에 줄 하나를 그어 돈을 받는 공권력이 있다 하자. 푼돈이 겁나지 않는 이들은 글자 그대로 급행료를 내고 먼저 도착해 이른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일상의 좌절과 출·퇴근의 무게를 한숨과 식은 커피로 달래고, 우리 아이들은 쓸쓸한 밥상머리에서 가장을 기다린다.   과거 다이아몬드 차선이라 불리는 HOV도 취지가 좋아 이해했고 막히면 막히는 대로 함께 맞는 비라 여겨 고까운 심정이 없었다. 극대화된 산업사회와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여 욕심껏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리하여 고단한 몸을 저택에서 먼저 쉬겠다는걸 뭐라 하겠는가. 그런데 그들이 누린 속도가 일반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어쩌면 시대적으로 잘못 태어난 그런 제도이거나 어쩔 수 없이 잘못 구현된 제도라도 대가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비행기에도 비즈니스석과 그보다 더한 것이 있지만, 고작 4.75달러에 그 자리를 넘기지는 않는다. 이코노미석보다 무려 3배 이상 더 치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비행기 안에서의 누림은 달라도 도착시각은 같아 참을 만했다. 오히려 똑같은 노선에 나보다 3배 이상 더 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알뜰과 현명함에 사뭇 기분 좋았던 기억도 있었다.   쇼핑몰에 가도 발렛파킹이 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차할 공간이 없다거나 너무 불편하여 입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잘난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서 수용 가능했다. 그런데 그것도 나이 든 중년의 시기 어린 타박이었을까? 함께 사는 세상에서 E-Z 패스는 겪을 때마다 찜찜하고 받아들이는 심기가 사뭇 달랐다. 인내와 관용을 넘어 나만의 유별난 감상일는지 모르겠다.   더욱 불길한 것은 이처럼 효용과 실용을 앞세운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내는 소득세를 기준으로 하여 투표권을 부여받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도 해본다.

2016-06-10

[살며 생각하며]오월의 아사코

오마주(Homage)는 존경, 존중을 뜻하는 프랑스에서 유래된 중세 영어이다. 오늘날엔 흔히 예술과 문학에서 존경하는 작가나 탁월한 작품을 흠모한 나머지 아주 약간의 변용을 거쳐 유사한 작품을 일반대중이 감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오마주라 일컫는다. 영화에서는 애정이 가는 선배 영화인의 감명 깊은 주요 대사나 장면을 본떠 표현하기도 하고, 음악으로 보면 정도에 따라 샘플링 혹은 각색이라는 이른바 다른 조명으로 비추어 보는 편곡 정도가 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서 패러디와 구별되고 원본을 밝히므로 또한 표절과는 구분된다 하겠다. 나만의 경우인지 모르겠으나 봉숭아 학당의 맹구처럼 나는 늘 신데릴라와 콩쥐 팥쥐의 이야기를 구별할 줄 모른다. 아이가 어렸을 적 잠자리에서 들려주던 이야기도 콩쥐 팥쥐로 시작했다가도 곧잘 신데릴라로 끝나곤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나에게는 그런 경우가 또 하나 있는데 거문고 아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있는 금아 피천득 선생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인연이라는 수필집에 나오는 아사코 이야기와 역시 같은 책에 연작으로 수록된 ‘오월’이 그러한데 이야기의 줄거리로서는 아사코를 그리고 그 배경으로는 바로 ‘오월’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그런 경우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선생의 또 다른 작품 ‘만년’이라는 수필까지 버무려져 마치 한 작품으로 기억되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때에 따라서는 미당의 시어까지 동원되는 등, 일관이 없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하나로 이어지는 특유의 허구적 효과를 남기게 되었다 신록의 계절 오월은 늘 이파리 속에서 빛나는 햇빛처럼 일렁이면서도 학창시절에 읽었던 선생의 수필 ‘ 너무도 나를 압도하여 감상과 느낌을 글로써 표현하는데 늘 실패하곤 했다. 그렇지만 재주 없는 나도 이제 오마주라는 장르에 의지해 그동안 주눅 들었던 나만의 오월에 대한 감상을 용서가 된다면 선생의 재주에 살짝 얹어 우리의 아사코를 기억해봐야겠다. “오월은 찬물 방울 튕기며 금시라도 세수를 한 애띤 얼굴, 앵두와 딸기의 달이며, 낯달 같은 모란의 달이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고 여유롭다. 그 앙징한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초록이 되고 초록은 어느덧 지쳐 단풍이 될 것이다. <…>” 이제 이 부분에서 이야기의 줄거리인 아사코의 이야기가 드디어 내 기억 속에서 회상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의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동안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늘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중략> 이제 나이가 들어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더러 내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 본 적이 있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이이는 진실로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신록의 이파리 속에서 빛나는 햇빛처럼 일렁이면서도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고 여유롭다. 그 앙징한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초록이 되고 초록은 어느덧 지쳐 단풍이 될 것이다. 원숙한 여인이 그러하듯 녹음이 우거지고 이렇듯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이려니 그래도 우리가 그 오월 속에 있나니 내 이제 나이를 세어 무엇하랴!”

2016-05-27

[살며 생각하며]선거가 있는 해에

중국에서 요사스런 동물을 쫓는데 벌거벗은 여인을 동원하던 관습이 있던 시절 이야기다. 서양 쪽 시기로 보면 로마가 생기고 그리스에서 제1회 고대 올림픽이 열리던 시기요, 동양에선 춘추시대 시작 직전쯤 될 것이고, 문명으로 치면 철기 문화가 꽃을 피우던 그래서 전쟁과 피로 얼룩지기 바로 직전의 기원전 771년쯤이다.   주나라 유왕 시절, 늘 입술이 붉고 이가 희어 단순호치(丹脣皓齒)라는 말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포사라는 미인이 살았다. 그런데 이 포사가 요즘 말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지 전혀 웃음이 없어 주왕의 애를 타게 하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에 살며시 배시시 웃는 것을 유왕이 알게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사를 기쁘게 하기 위해 비단 찢는 소리가 궁궐에 가득했다. 전국에 비단을 세금으로 징수하여 단지 배시시 웃는 포사의 붉은 입에 흰 이를 보기 위해 취해진 절대 권력자의 취향치고는 분명 고약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반복되어 싫증 났는지 나중에는 포사가 비단 찢는 소리에도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의 웃음을 닫아버려 우울한 구중궁궐의 분위기 속에서도 끔찍한 기적은 한 번 더 일어났다. 기적인 즉슨 어쩌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올랐는데 그것도 무슨 가학적 쾌감인지, 허둥대는 백성들의 모습에 그만 웃어버린 포사의 미소로 주왕은 포사의 웃음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봉화를 올렸으니, 나중에는 우리가 아는 대로 견융족이 쳐들어와도 봉화는 올랐으나 모이는 군사가 없어 주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서주 시대가 끝나고 동주 시대로 접어들면서 춘추시대의 시작을 열었다. 후대에는 나라를 기울게 한 경국지색의 한 원전이 되었고, 서양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후로 이 사건은 묘하게도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이야기로 거짓말의 경계를 후대에 전할 때 늘 쓰는 고전이 되어버렸다. 요사스런 동물을 쫓는 데 벌거벗은 여인들이 동원되던 관습은 후에 아편 전쟁 때까지 계속되어 영국 군대의 군함을 물리치기 위하여 청나라는 부인들이 쓰던 요강을 모아 영국 군대가 보이는 언덕에 쌓아놓고 ‘요사스러운’ 행동으로 군함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이 관습의 효험은 가소롭기 짝이 없고 그야말로 어림없는 짓으로 여지없이 역사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후 3000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은 바뀌었고 다행히도 우리는 나라의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직접 뽑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썩어도 그걸 지키려는 세력이 있듯이 막말과 코미디 같은 난센스로 세상일을 주워 삼키고 비뚤어진 관습과 재치 문답으로 선거판에서 재간둥이로 비위를 맞추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책임하게 귀에 듣기 좋은 대로 비단을 찢고 여론의 단순호치를 훔쳐 보기 위해 낭자하게 봉화를 올리는 이가 온갖 술수와 재주를 피워 올리는 가 하면, 강한 미국을 위해 우리 모두 요강을 모아 산 위로 올라가자고 부추기는 해괴한 서커스 꾼도 있으리라.   마장이 안되려면 당나귀만 모인다고 했다. 올해는 선거가 있는 해이니만큼 눈을 부릅뜨고 볼 일이다.

2016-05-13

[살며 생각하며]발밑을 살피는 지혜(照顧 脚下)

중국 송나라 때 오조 법연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선문답에서 ‘거울이 삼라만상의 상을 맺은 후 거울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상을 맺고도 거울은 만상 어디든지 존재한다고 하여 유일하게 통과한 바로 그 법연스님이다. 법연의 문하에 특별히 배움과 닦음이 남다른 제자 세명이 있었는데 혜근, 청원, 극근 스님이 그들이다. 겨울을 코앞에 둔 어느날이었다. 법연이 세 명의 제자와 밤길을 밝혀 산길을 내려오다 가랑잎 솟구치는 바람에 그만 등불이 꺼져버렸다. 사위는 칠흑 같았고 발밑엔 천길 낭떠러지요 큰 짐승이 있던 시절이니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법연은 제자들의 수행을 가늠할 겸 자신의 두려움도 떨칠 요량으로 “자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라고 어둠 속에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첫 번째로 혜근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느낌을 말했다. 광란하듯 채색 바람이 춤을 추니 앞이 온통 붉사옵니다 하였고, 두 번째 청원은 쇠 뱀이 옛길을 가로질러 가는 듯하옵니다 하며 뜻 모를 말만 늘어놓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대답한 극근의 말이 걸작이었다. 우선은 불을 비추어 발밑을 봐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현답을 추려내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아마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던 노승의 눈매에도 미소가 돌고 얼굴까지 환해지는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흔히 산사에 가면 법당이나 승방에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글귀가 걸려 있다. 좁혀 해석하면 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가르침도 되겠지만 아마도 그보다 더 큰 섭리가 어려있을 듯싶다. 법연의 시대가 지나도 깨달음은 계속된다. 시대를 달리하여 한 수좌가 선사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선사가 대답한다. “불을 비추어 네 발밑을 보라.” 수좌는 거창하게 구도의 근본을 물었지만, 대답은 지극히 소박했다. 필경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먼저 알라는 말일 것이다.  도는 뜻밖에 눈감은 후 기침 소리처럼 바로 그 눈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으로 풀이하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소크라테스 언어로는 ‘너 자신을 알라’가 될 것이며 성경으로 말하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로 까지 외연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흉흉하다. 광명성이 올라간 후 세상은 그 이름이 뜻하듯 더 밝아진 것이 아니라 훨씬 어두워졌다. 남북관계는 통일 대박을 외치다 별안간 버르장머리를 움켜잡았고, 개성공단에 빗장을 걸어 마구잡이 멱살잡이로 치닫고 있다. 본디 한 몸에서 나왔으나 이제는 영락없이 콩깍지를 사르고 태워 콩을 삶고 있는 형국이며, 이웃은 빙글거리며 팔짱을 낀채 불을 쬐고 있다. 밖에 나와 사는 우리가 봐도 씁쓸하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같은 문제일 것이다. 거울이 상을 맺고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남의 눈만 찌르고 현상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셈하고 생각을 굴려보며 우리들의 발밑을 한번 비추어 보자. 조고각하, 그것은 꼭 불문의 가르침만은 아닐 것이다.

2016-04-22

[살며 생각하며]시대 유감

없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역과 출신을 떠나 우리가 60년대 또는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늘 누런 코를 인중에 달고 다니던 동무의 기억이 아마 한둘은 있을 것이다. 언제나 훌쩍거려 소매가 반질거리던, 어느 꽃그늘의 추억처럼 보편적 가난 아래 놓인 유년의 기억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옛동무들, 그들은 과연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 모를 그런 단상 말이다. 하지만 그 코가, 코의 분비물이 아니라 뇌에서부터 흘러나온 뇌의 노폐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황당한 추정과 일반의 믿음이 1900년대 초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바로 잡힌 것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의 피를 뽑아 사람에게 넣어보기도 하고 오늘날의 식염수 대신 우유를 사람의 혈관에 흘려 넣어보기도 했다. 게다가 심한 출혈로 죽어가는 다른 사람에게 사람의 피를 뽑아 주입함으로 어떤 경우는 살고 어떤 경우는 죽어 의사들을 당황케 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겨우 1900년대에 들어와서야 혈액형의 존재를 알아냈고 RH형의 피가 존재한다는 것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바로 인류의 희생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3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염병의 실체가 마녀가 악마와 작당을 하여,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병을 퍼트린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흑사병이나 다른 감염 질병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무지와 온갖 저주 아래서 자행된 마녀사냥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인류가 최초로 망원경을 만들어 별을 관찰했을 때 그들이 발견하리라 예견했던 것은 그 별 속에 의자에 앉아 있을 근엄한 신의 모습이었다. 세월은 흘러 인류는 아폴로를 띄웠고 달나라의 월계수와 절구질하던 토끼설화를 없애버리더니 우리가 채 늙어 죽기도 전에 고향은 없어지고 유년의 뜨락이던 초등학교는 어느덧 3차 신동아 아파트가 되어버렸다. 낯선 땅에 옮겨와 가정을 이루고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동안 우리 모두 귀밑머리가 허옇게 변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우리가 그만큼 똑똑해진 것 같지는 않은데 동료의 천재성에 기대어 고스란히 그 혜택은 받는 것 같아 그저 죄송하다. 천문학의 발달로 빈센트 반고흐가 그린 ‘밤의 별빛과 카페 테라스’에 담긴 별모습을 보고 정확히 1888년의 어느 날이며 아무시라고 규명할 수도 있게 되었다. 최근의 일로서 인간의 복잡한 추론과 경험의 체계가 필요하다는 바둑에서마저 컴퓨터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우리들의 바둑천재를 연거푸 무릎 꿇게 했다. 호사가들은 인류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입을 모았다. 못난 내가 봐도 인류사는 이미 문명의 가속도가 붙어 그런지 참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다. 세상이 바뀌면서 ‘도대체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두어야 하느냐’던 어느 시인의 음울한 구절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100세 시대라는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맞아야 하고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할는지. 봄이 다투어 냉큼 꽃을 피우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체사피크에 가서 왠지 베이브릿지라도 건너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그런 장려한 일몰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6-03-25

[살며 생각하며]삶의 마라톤 42.195Km

옛날부터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이 풀리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이 깨어난다’는 말이 있다. 우수(雨水)는 24절기의 하나로, 동풍이 불면 언 땅이 녹고 눈이 비가 되어 내리며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뜻으로 날씨가 많이 풀려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트는 절기다. 정월의 중기이며 입춘과 경칩 사이에 있어 그야말로 수달이 물고기를 물고 다니고, 기러기들이 돌아오고, 눈 덮인 산그늘에도 조금 성급한 대로 진달래가 움트는 시기이다.   계절의 변화를 우리가 사는 경제에 대입해 본다. 최근 일련의 경제지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경제 사이클과 24절기의 순환주기는 각기 파장과 파고가 다르지만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최저점을 지나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매일 조금씩 파산하는 주변의 얘기를 들으며 ‘누구네는 이미 가게를 그냥 닫고 나왔다더라’, ‘이 집사네는 모기지는 못 내도 거기서 몇 개월을 버티면 그래도 손해를 줄일 수 있다더라.’ 등 가정경제를 책임진 소시민들에게는 실로 듣기에도 으스스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비는 위축되고 외식도 씀씀이도 줄어 집도 보험도 자동차 업계도 모두 위축됐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하지만 다하지 않는 어둠이 없듯이 경제도 나름의 성장동력을 찾아가면서 긍정적인 면으로 바뀌고 있다. 호시절은 아니더라도 그동안 졸라맨 허리띠를 조금은 풀어놓을 기회였으면 한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한다.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접어든 요즘은 더욱 실감 나는 말이다. 혹자는 명쾌한 로드맵을 가지고 굳건하게 생의 한가운데로 달려가지만, 주위에 이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굴곡진 삶을 살면서 쉽게 잊기도 하고 잊히기도 한다. 힘든 시절을 지나온 이들이 살아가는 보통의 삶이다.   나도 그랬다. 산 전체를 가늠하고 단숨에 올라가려면 일순간 압도되어 포기하기 쉬운 것처럼 더러 힘들 때는 앞사람이 올라가는 발뒤꿈치만 보고 따라간다. 전체를 조망하기보다는 딱히 힘들면 땅만 보고 구간 구간 올라가는 이른바 흐름과 관성의 무심한 등산 방법이 훨씬 효과 있고 실제적일 수 있었다.   극한의 마라톤을 조바심만으로 단숨에 뛸 수 없듯 구간 구간 나눠 왼발은 오른발을, 오른발은 다시 왼발로 이어지는 무한 반복의 관성으로 뛰어가는 것도 한 요령이 될 수 있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삶이 즐거움이라는 유희만으로 구성된 무용이 아니어서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 고통분담이 조금이라도 힘겨운 씨름판이라면 한번 무심히 나누고 쪼개어 접근해보자. 옛 분들이 그렇게 하여 힘든 삶의 무게를 각기 입춘, 우수, 경칩, 청명, 곡우 등 각기 보름씩 배분하여 24절기로 나누고 쪼개어 삼백 예순 날을 견뎌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절기가 바뀌니 나도 거둬들일 가을 들녘을 위해 어김없이 밭 갈 채비를 다짐해본다.

20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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